차범근은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와 국제적 위상을 새롭게 정의한 인물이다. 그는 국내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당시 아시아인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벽처럼 여겨졌던 유럽 무대에서 성공을 일궈냈다. 차범근의 경력은 한 사람의 축구 인생을 넘어, 대한민국 스포츠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전설적 사례로 기록된다. 본 글에서는 차범근의 성장 과정부터 선수 시절의 활약, 지도자로서의 경력, 그리고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까지 심층적으로 다룬다.
1. 성장기와 축구와의 첫 만남
차범근은 1953년 5월 22일, 경기도 화성군 출신으로, 1950년대의 어려운 시절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체력과 운동 신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운동에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축구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며 축구에 몰입했고, 이러한 열정은 학창 시절에도 이어졌다.
수원북중학교와 수원농림고등학교(현 수원농생명과학고)를 거치며 그는 지역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 실력을 눈여겨본 여러 대학교의 러브콜을 받았다. 결국 연세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만 해도 축구 인프라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던 점을 고려할 때, 순수한 재능과 노력만으로 성장해간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2. 국내 무대에서의 활약과 국가대표 발탁
연세대 시절 차범근은 대학 축구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다. 스피드, 체력, 기술을 겸비한 공격수로서 전국대회에서 다수의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고 김정남 감독의 눈에 띄어 1972년 만 19세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대표팀 합류 이후 그는 곧바로 핵심 공격 자원으로 자리잡으며, 1972년 AFC 아시안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또한 1974년 아시안게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등 다양한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무렵 그는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에서 실업축구를 병행하였고, 이후 군 복무를 위해 공군 축구단(당시 신생팀)에 입대하며 군 선수로서도 활동했다.
공군 시절에도 그의 경기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팀들을 상대로 다수의 골을 기록하며 ‘아시아의 득점 기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명실상부 대한민국 축구의 에이스였다.
3. 유럽 진출 – 아시아 축구사에 남긴 획기적 전환점
1978년, 차범근은 아시아 선수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하게 된다. 처음 입단한 팀은 SV 다름슈타트 98이었으며, 이는 독일 2부리그 성격의 팀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사례였다. 그가 유럽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의 분데스리가 경력은 다름슈타트를 거쳐 1979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UEFA컵(현 유로파리그)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유럽 대항전에서 거둔 성과는 아시아 선수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벽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차범근은 빠른 발과 강력한 중거리 슈팅, 강한 체력으로 독일 언론으로부터 "열정적이고 전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선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1983년,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그는 다시 한 번 UEFA컵 우승을 경험하며 유럽 클럽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레버쿠젠 시절에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으며, 분데스리가 통산 308경기 출전 98골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기고 1989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4. 국가대표팀의 핵심 – 1970~1980년대 대한민국의 축구 상징
차범근은 대표팀에서도 핵심 공격수로 오랜 시간 활약하였다. A매치 136경기 출전, 58득점(비공식 포함 시 121경기 55득점)은 그의 기량을 증명한다. 특히 1978년과 1986년 아시안게임, 그리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여전히 축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1986년 FIFA 월드컵은 대한민국이 3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대회로, 차범근에게는 마지막 대표팀 무대였다.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같은 강팀을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전 세계에 한국 축구의 저력을 알렸다.
5. 지도자 전환 – 한국 축구의 새 방향을 제시하다
선수 생활을 마친 차범근은 지도자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1991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그는 비교적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당시 공격적인 전술과 과감한 세대교체로 주목받았지만, 대회 직전 해임되며 본선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이후 199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팀을 K리그의 강호로 성장시켰다. 2001년 아시아클럽선수권(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K리그 우승, FA컵 우승 등 다수의 트로피를 수집하며 명장 반열에 올랐다. 당시 '차붐 사커'라 불리던 그의 공격적인 축구 스타일은 이후 K리그 전체의 전술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
6. 축구 외적 영향력과 사회적 활동
차범근은 은퇴 후에도 축구 해설가, 방송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축구에 대한 관심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해설자로 활약하며 대중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또한 그의 아들 차두리 역시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201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부자의 대표팀 활약은 희귀한 사례로, 차범근이 후배 선수들과 가족 모두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사회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인 그는 유소년 축구 발전을 위한 재단 설립, 스포츠 복지 사업 후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축구계에 환원하고 있다.
맺음말 – 전설은 계속된다
차범근은 아시아 축구의 새 길을 연 선구자이자, 한국 축구를 세계에 알린 개척자이다. 그는 유럽에서의 성공, 국가대표팀에서의 헌신, 지도자로서의 리더십, 그리고 현재의 멘토로서의 역할까지, 단일 인물로 이루기 힘든 다양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지 않는다. 대한민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거두는 성과 속에는 언제나 차범근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의 이야기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진정한 전설의 기록이다.